2015년 9월 19일 토요일

北3호청사 지하 '영웅관, 도요타 다이쥬, 김대중 조사


1. 김대중은 김정일에 충성하는 골수 좌익입니다
 
 
(1980. 5,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김대중은 805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20일과 525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습니다.
1. 1945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좌익 백남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형편이었으므로, 좌익분자와
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있다가 2
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는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 "
새끼가 아직도 반성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
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10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
했음.
 
9.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민통의 결성 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 19738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973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
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
으며, 총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
,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1980. 7,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사형)
1980. 7. 31, 검찰은 김대중의 성장 환경, 해방 후의 좌익활동, 한민통의 조직 및 좌익
활동, 폭력시위, 광주사태 선동 및 배후조정에 관해 단죄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민
통을 결성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면서 좌익활동을 했습니다. 한민통은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자입니다. 지금의 민주당도 "국민회의"였습니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사살한 문세광이가 한민
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 직후에 들어왔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
원입니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했습니다"(9881118
국회 광주 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한민통은 좌익
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공산당 선전지였습니다.
 
김대중에 적용된 법조문은 1)형법 제90조 제1, 2, 872)계엄법 제15, 13,
계엄포고령 제1조 제13)국가보안법 제1조 제14)반공법 제5조 제15)외국환 관리법
35, 17조 제16)형법 제37, 38조였습니다.
 
그의 좌익행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
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
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
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
,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
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 1980911일 사형구형)
 
8. 19811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3일 징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11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
).
2. 19458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
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
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97"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6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
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
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2. 1997,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4. 일반에게 노출된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것 말고도 김대중은 61억엔을 받았다
는 설을 포함해 많은 말들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수사할 조직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
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이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퍼다주는 것은
이 빚을 10배 이상으로 갚으라는 김정일의 요구라고들 하지만 이 역시 심증만 가지 확증은
없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공론화돼야 한다는
것이 2002년도의 대법원 판결입니다. 첫째, 김대중은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자금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세도 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북한 돈이 없었다고는 누구
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북한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당시의 20만 달러라면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합니다.
 
셋째,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고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정
일로부터 노출됐습니다. 넷째,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북한에 퍼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
산 관광객이 가거나 안 가거니 무조건 1년에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고 1인당 300달러씩 정
산해주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몰래 준 돈도 수십억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미
국이 공식적으로 밝혀 준 것은 아직 4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 네 가지는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김일성과 좌익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받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
. 문제는 그가 좌익으로 정치 일생을 출발했고, 좌익들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좌익들과 꾸
준히 연대해왔고, 지금도 좌익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장인 김정일 찬양)
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2000)
1)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 (200029일 도쿄방송)
2)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2. 2000, 3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하
고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
습니다.
3. 많은 돈을 뿌리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으면 로버트 김을 석방해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일 식견있는 지도자입니다. 국제금융을 동원하여 북한을 도와줍시
"하다가 THIS MAN의 경멸적인 호칭을 얻고 힘이 빠져 돌아왔습니다.
 
 
(적장과의 내통행위)
1. 김대중은 김정일로부터 동지적 사랑도 받고 깊은 은혜도 입었다 합니다.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입니다. 중요한 것만 발췌합니
.
"지금 정권을 쥐고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
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
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
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1999.2).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
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11).
 
2. 김정일의 추가적인 폭로가 무서워서인지 김대중은 200.3월에 베를린 선언을 기획하여 김
정일에 접선해 줄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06.13 6.1590
간의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생동안 색깔로 의심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북 관계에서 만이라도 투명해야 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단 둘이 갈 때
40분 올 때에 50분간 일행을 이탈해 따로 밀담을 갖는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북한 관계의 특성과 그의 색깔론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초법행위요
국가보안법 위반입니다.
3.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4. 북한의 사상 최대의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속이려 했습니다. "2000년의 전력
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연합사령관
의 보고내용은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
에 대대적으로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 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5. 북한의 적화통일 행사에 많은 이적단체들을 여러 차례 보내 김정일에 충성을 보였고,
들의 적화통일에 동조한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6. 2001. 2, 미국방문 전, 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후인 1975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
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7.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반공전선 와해)
1. 국가통수권자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한 것은 군.민의 안보정신을 허무는 이적행위였습니
.
2.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군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내통자로 의심
받아야 합니다.
3.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감싸야 할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
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5.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습니다.
6.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홀리도록 하고 그 언론사 사장
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펴게 했습니다.
7. 국정원으로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
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8.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했습니다. "110
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
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모두를 뒤집어서 교육했습니다. 많은 언론
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9.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일 사진을 실었습니다. 학생의대부분, 초등학생의 90% 이상이 김
정일을 멋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0. 전교조의 좌익 용공 교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남침 통로 열기)
1. 200012월까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흘 묵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
제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타당성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침용으로 사용
될 수 있는 남측 길만 열어주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3. 2001.6,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있고, NLL도 개방하며, NLL일부를 북한에
떼어내 줄 것을 시사했습니다.
4. 연천의 제5땅굴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천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한국군의 손발 묶기)
1.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된 "UNC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먼저 쏘지 마라", "청와대에 먼
저 보고하라"며 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적장에 군자금 대주기)
1. 러시아에서 받은 돈 147천만 달러를 안 받을 테니 그 대신 러시아가 북한에서 받을 돈
50억 달러를 받지 말라는 거래를 했습니다.
2. 알게 준 돈은 5조 규모입니다.
 
3. 모르게 준 돈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미국이 그 일부를 폭로해 주었습니다. 2000년도
한 해에 4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비밀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의회 조사국(CRS)2002.
2. 25, 의회에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미CIA와 주한미군 사령부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밝혔습니다.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 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4억달러를 북한
에 주었다. 관광대금 4억 달러도 주었다. 8억 달러가 갔다. 그 중 4억 달러를 무기 구입
에 사용했다"는 요지였습니다. CIA20011월 이 내용을 한국정부에 경고했지만 한국정부
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러주기를 강행했다 합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2002. 3. 27 일간지들)
 
4.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을 강요하고,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에 세무조사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5. 2년전에 환했던 평양시내가 지금은 깜깜하답니다. 전기가 무기제조 및 땅굴 굴착에 사용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북한에 경수로 용량과 맞먹는 50KW의 전기를 공급
하려다 미국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6.. 금강산 사업으로 퍼준 돈, 비밀리에 상납한 돈, 앞으로 임동원이 북한에 약속할 돈 이외
에도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에 지원한 돈은 쌀, 비료, 투자비 등이 24천억입니다.
필자의 조사로는 현 정부에 들어 이제까지 북한에 퍼 준 돈이 다음과 같이 집계됐습니다.
1) 2000.9.28: 60만 톤(3,120억원)
2) 6회에 걸쳐 104만톤(4,660억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1864억원
 
4) 1999년 한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업체 당 평균 745억 원.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이며 지방세의 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5) 9910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445만 달러: 58억원)
6) 998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원)
7) 9911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투자(22억원)
 
8) 2000125일 현대아산이 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원)
9) 200028,863평 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450억원)
10)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 달러 투입(4,000억원)
11) 20003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자(52억원).
12)20003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10억원)
 
13) 내복 1,000만벌(600억원)
14) 200036일 축협에서 계란 1천만 개,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15) 2000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
총계 23,892억 원이다.
 
7. 앞으로 더 가는 돈: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
,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
12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 합니다(2002,4.23
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반공 역사 말살하기)
1. 2000101, 이어서 6.25"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했습니다.
2. 어이없게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베트남 대통령에게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본 것입니다. 2001. 8. 23, DJ가 천득렁 베트남 주석 환영만찬
에서 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
안하게 생각한다"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한겨레 21"!
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색깔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겨레 21. 강정구, 한홍구 같은 사람들은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월맹군을 민족
해방군, 미군/한국군을 반역군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이 가세한 것입니다.
 
3. 여수-순천, 4.3 반란사건을 일으켜 방화 살인한 좌익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둔갑시켰습니
.
4. 13년전, 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게 주상을 입힌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
화투사로 명예회복시켰습니다.
5. 13년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에을 민주화투사로 둔
갑시켰습니다.
 
6. 좌익 대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켜 최고 2억까지 보상합니다. 반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은 약값조차 제대로 대주지 않고 있습니다.
6.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한총련에까지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7. 과거의 사법부 재판의 권위를 몇 명의 수상한 무명인물들이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위
원회"를 만들어 짓밟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법부가 현재의 "민간심의위원회"보다 못한 것입
니다. 과거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9. 애써 잡은 63명 간첩은 영웅 취급해서 보내주고,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는 쥐어박고 입을
막습니다.
 
10.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극진히 대접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15명의 유족은 홀대하
고 학대합니다.
11. 국군 포로를 이산가족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12. 좌경 데모는 보호하고, 보수 데모는 차단합니다.
13.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는 활동을 은밀히 차단합니다.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합의케 했습니
2. 언론사들에게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합의케 했습니다.
 
3. 언론사 죽이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과 동아를 죽이려 했습
니다. 국세청 800명 인력의 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를 폈습니다. 서울방송에
51, 조선일보에 50, 동아일보에 35, 중앙일보에 24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
회도 가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들어 언론을 잠재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국가가
도둑을 맞아도 짖는 개가 한 마리도 없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기막힌 거짓말)
1)"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1967)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
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19676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DJ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2)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1997)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
라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
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
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
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3)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2002.6)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국민 여러
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
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드렸으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
니다”. (2002.6.21 일간지 일동)
 
4) 2002.07.10, “국민 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2002.7)
김대중씨가 박선숙 대변인을 통해 차남 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조세
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발
표된데 대해 한 말입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했습니다. 현대에서 16, 삼성에서도
5억을 받았고, 2개 업체들로부터 매달 5천만원을 받았다 합니다. 임동원한테서도 때때로
2,500만원, 신건 한테서도 1,000만원씩의 상납을 받았다 합니다(2002.7.11 조선, 중앙).
 
홍업씨는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그 앞에 가구를 쌓아 놓고 지냈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부정한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왔습
니다.
 
이런 사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홍업이가 검찰에 숨긴 사실, 검찰이 또 점수 따려고 감싸
준 사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더구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서 송정호 법무장관에게 수
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는데도 이 정도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6.11일 오전, 국무회의
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어른이 매우 섭섭해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
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요?"
 
5) "이 김대중은 일생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적 없습니다"(1997).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
하고는 다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6)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
니다"(1997).
"하나 첨부하면 제가 집권하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축소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비
서실로 만들고 모든 국정은 국무위원들과 협의해서 하겠습니다. 지금 보면 이 나라에서는
청와대 비서관 회의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국무회의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해요. 청와대에
서 국민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지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
면 쩔쩔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건 이 나라 헌법 질서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도 앞으로 시정할 것이기 때문에 비서들 자신들이 정치를 농단하는 일은 저희 집권
하에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7)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2000),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112,222만원)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
(중앙일보 2000.12.11)
 
8)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2001)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2001. 12.10 조선일보).
 
9)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2002).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 기념관을 지을 것
이다". (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10)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1997).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사
, 어렸을 때부터 안하무인으로 컸고 71년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그래서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위험한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
지 않습니다". (1997.10.8 관훈클럽)
 
1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2000)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 (20002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12)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1997).
"저는 집권하면 북한에 대해서 분명히 따질 것 따지고 짚을 것 짚고 그래가지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그 가장 전제조건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동당 규약은
북한에 있어서 헌법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13) "김정일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2002).
그는 김정일에 알게 모르게 현금과 쌀로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5조원 규모입니다. 그는 일
본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입을 열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그가 물러나기 전에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입니
. 노벨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해
죄를 지은 기분이리고 말했습니다.
 
14) 1980.3.26일 김대중의 YWCA 초청 연설문입니다. 그의 사기성이 잘 나타나
있는 연설문입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
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느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
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
니다(박수, 옳소! 환호).
 
나는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돈과 하느님은 같이 섬길 수가 없고, 돈과 양심을 같이 섬
길 수가 없다. 돈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부의 노예가 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그리고 교만해지고 타락
한다. 따라서 만일 너희들이 경제계에 나가서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등등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만일 부자가 되면 아버지와 너희들과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
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
.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박수, 환호).
 
그러나 국민과 양심을 버리고무슨 수단을 쓰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죽으면 죽었지 추구할 수 없는 길입니다.(옳소! 박수)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 첫째,
경제만 보더라도 박정희씨가 아주 망쳐 놓았습니다(박수. 옳소! 환호).
 
이것을 맡아 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마치 다 파먹은 김칫 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
찬가지입니다(옳소! 박수).
4년 동안 뒷치닥거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뒷치닥거리를 하고
나면 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웃음, 박수).
 
남북문제, 노동문제, 청년·학생문제, 군대를 통솔하는 문제 등등 다음 대통령의 짐이 여간
무겁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누가 한 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
난 뒤 그때쯤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박수, 환호)
 
여러분! 나는 아직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기서 공개할 수 없는, 그 동안 많은 치욕과 고
통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나를 바닷 속에 상어밥이 되게 던지려고 할
때도,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국민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법정에
섰을 때도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당신들이 나를 지금 재판하지만 역사와 국민은 내
이라는 것을 얘기했습니다(옳소! 박수).
 
누구에게 천대를 받건, 누구에게 멸시를 받건, 누구에게 박해를 받건, 아니 오늘 생명을 잃
, 내 국민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국민만 나와 같이 있고, 내가 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한은, 김대중에겐 불행이 없고 김대중에겐 슬픔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
립니다(박수, 옳소!)
 
따라서, 나는 지금 게딱지같은 국민주택에 살고 있지만(웃음),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
는 것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국민을 택했습니다. 국민을 배반하면서 안전을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 신념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여러분!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내 스승입니다. 나는 하
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형님입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
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스승 예수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권
리와 행복을 위해 싸운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
씀드립니다(박수).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간첩선을 내려보냅니다.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남한을
뒤집어엎겠다는 소위남조선 해방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의 안보와 반공
의 태세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박수, 옳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와 안정을 줌으로써 국민들이
이 땅에 정을 붙이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
려고 하는, 공산당 침투의 여지가 없는 반공과 안보를 주장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요 박정희
씨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박수).
 
국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김대중이가 있습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데 김대
중이는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천 번 죽어도 국민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로
하면,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 명령하면, 나는 다시 열 번 납치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번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 번 연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할 것
을 다짐합니다!(옳소! 환호, 박수) (연설 끝)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대중)
1980.5.18일자 경향신문도 이날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
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로 김대중
을 비난했다. 아래는 경향신문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김대중의 이력서)
19596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
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 자살했다.
김대중은 그후 62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
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1945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
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
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
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
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
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
.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
.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
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
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
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
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7백만원 중 7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행위)
1960729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
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
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61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
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
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
어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로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
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위)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4억원,
1억원 등 5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29(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
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
.
 
604~61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7
만원중 7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
으로부터 38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450만원을 사취했다.
 
그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1972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
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
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
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 도요타 다이쥬
도요타 다이쥬
[도요타란 밭에서 농사짓는 사람 뜻으로 일본에 군부가 등장하며 호주제 개편 때  성이 따로 없는 천민들에게 우물에 사는사람, 강가에 사는 사람, 밭에서 농사짓는 사람의 형식으로 성을 부여한 일본 천민의 성씨. 다이쥬는 대중]

도요타 다이쥬
“북한이 자유는 없지만 빵은 보장된다”: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 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보장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이해하고 있다.” (1970년 2월23일, 내외타임즈 및 뉴욕타임즈).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책임을 일본 정부에 더이상 묻지 않는다는 결정도 이끌어 냈다[매일경제 기사(1998. 10. 7)]

성시백은 김구를 포섭하여 김일성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들러리를 서게했던 1등공신이다. 그래서 대남공작 영웅 제1호는 성시백이고, 북한 영웅관에 성시백 사진이 제일 먼저 걸려 있다고 한다. 성시백으로부터 몇 개의 사진들을 지나치니 김대중의 사진이 걸려있더라 했다. 증언자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자, 안내자가 하는 말 “그 사람 우리 사람이야”

"김 전대통령이 북한에 4억 5천말 달러(Dollar)를 갖다줌으로써 북한이 그걸로 핵과 무기 개발에 써서 김대중 정권때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고, 이어서 정권창출한 노무현 정권때인 2006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김 전대통령이  노벨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북한에 4억 5천만 달러를 갖다줬고, 많은 이들이 영화 '연평해전'을 봐서 알겠지만,  2000년 김대중 정권때 북한의 함정이 국경선을 넘어와도 먼저 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는 바람에 고스란히 북한 함정의 포격을 받아가지고 애꿎은 우리 국군 장병들만 죽었지 않았냐 ? 김대중 정권때 그렇게 국가의 안보가 벼랑 끝에 놓였었다."


"김대중 정권때 북에 갖다준 4억 5천만 달러때문에, 대한민국의 5천만 국민들의 생명과  삶이 핵도발의 위협속에서 인질이 되는 상황으로 빠진 위험한 상황인데, 무슨, 김 전대통령이 통일의 물길을 텄다는 것이냐" 


@@@@@@ 7분이 경과하자 김대중의 무서운 정체  

[KANIS 학회] 유동열 1 : 3호청사 지하 '영웅관'에 김대중 사진
유튜브에 올려 진 짧은 동영상, 7분이 경과하자 김대중의 무서운 정체가 폭로됐다. 3호청사는 대남공작을 주도하는 총사령부, 그 지하에 영웅관이 있다. 그 영웅관에는 김정일이 서명(북한 말로 수표)을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거기에 들어갔던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가 아래 유튜브 7분이 지난 시각에서부터 소개돼 있다.
 
대남공작 영웅 제1호는 우리가 늘 알아왔던 그대로 성시백, 그에 관해서는 도동신문이 1997526, 3개 면을 할애해 자세히 소개했다. 성시백은 김구를 포섭하여 김일성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들러리를 서게했던 1등공신이다. 그래서 대남공작 영웅 제1호는 성시백이고, 북한 영웅관에 성시백 사진이 제일 먼저 걸려 있다고 한다.
 
성시백으로부터 몇 개의 사진들을 지나치니 김대중의 사진이 걸려있더라 했다. 증언자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자, 안내자가 하는 말 그 사람 우리 사람이야참고로 이를 소개한 사람은 공신력이 있는 전문가다,
 
김대중, 언제까지 전라도와 빨갱이 세계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으려나?
2013.10.1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 대북공장 휴민트

대북 공작3000, 250명 숙청된 98년이 분수령
 
국정원 대량 학살 사건. 국정원학살 주범 이종찬, 이강래(대공수사요원 581. 김대중 임명 이종찬 원장. 이강래 기조실장). 숙청 대상: 김대중 싫어 했다고 보는 사람. 당시 대통령 후보 이회창 적극 지지 했던 사람. 한나라당 고위 공직자와 친분이 있던 사람.
 
[경향신문] 황교안 법무부 장관 고검장 때 교회 강연파문
대공경찰 2,500여명. 기무사 대공요원 600여명. 공안검사 40여명.
 
대한민국 휴민트 학살사건
 
김대중, 이종찬, 이강래가 저지른 안보라인 대숙청 음모
 
국정원대공요원 581명 숙청하고 호남인500명 특채한 김대중정권
 
김대중의 '국정원 대량학살사건'
 
'김대중은 김일성이 심어놓은 간첩이었다'는 충격증언
 
김대중의 대공전문요원 대학살 사건
 
김대중, 대북 요원 3000, 250명 숙청
 
대북 공작3000, 250명 숙청된 98년이 분수령
이춘근박사 강연
 
김대중은 19984월 속칭 '국정원 대량숙청사건'을 일으켰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본 것은 국정원이었다.
대한민국 종북좌익의 원조이자 거두였던 김대중으로서는 국정원과 악연이 깊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국정원에 의해 국내로 납치된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국정원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갈을 전가의 보도처럼 선거에 이용하곤 했었다.
199841, 국정원 직원들은 만우절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재택근무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구조조정 명분으로 한 순간에 책상이 없어진 직원은 무려 581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공활동의 전문정보 수사요원들이었고, 이들의 70%가 영남 출신들이었다.
국가정보원을 사랑하는 모임의 대표이자 국가안보기능회복추진위원회상임대표인 송영인은
숙청된 직원들의 기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김대중을 싫어하는 사람,
둘째, 이회창을 지지한 사람,
셋째, 한나라당의 고위당직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 순이었다.
'국정원 대량숙청사건'에서의 도살자는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국정원장과 이강래 기조실장이었다.
김대중이 보수우파로부터 종북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국정원만을 숙청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한민국의 대공 활동 전체를 무력화 시켰다.
공안기관 대공경찰 2500명의 자리가 없어졌고, 기무사 요원 600여명, 공안검사 40%가 자리를 잃었다.
반국가 활동의 전력이 있던 김대중으로서는 이들을 그냥 두는 것은 뒤통수가 근질거릴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쫓겨난 자리에는 민변출신의 변호사와 호남출신의 좌경화 인사들이 무시험 특채로 국정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공 업무에 대한 자질이나 간첩 잡는 교육은 무시되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김대중의 숨겨진 딸'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당시 김대중의 숨겨놓은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국정원 직원이었다, 대통령의 숨겨진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는 일이나 하던 정보원들이 무슨 수로 간첩을 잡을 것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간첩 수준의 인간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간첩을 잡았다는 뉴스가 거의 없었다. 간첩이 잡히기보다는 비밀 정보업무를 하던 정보원이 민간인에게 들켰다는 뉴스가 더 많았다. 좌익정권의 국정원은 미션임파셔블의 탐 크루즈와는 거리가 멀고 일반 절도범 수준이었다. 김정일이가 황천길에 올라도 국정원이 모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순전히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있기 때문이었다. 기술자들이 대거 잘리면서 대공정보 수집능력은 탐문 수사나 하는 파출소 순경 수준이 되어버린 것은, 이런 대공기관 무력화의 원인은 순전히 김대중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휴민트 사건이 있다.
휴민트는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로 적의 수뇌부에 잠입하는 임무를 하는데 대북 정보망을 파악하고 적을 교란하기 위해 투입되는 북파공작원들이 그들이다. 김대중 정권때 고의적으로 대북 정보망을 지닌 인사들과 요원들의 신분을 공개해 사실상 대북 정보망을 아예 차단시켰는데
이것은 즉 북파 공작원들은 김대중 정권 당시 북한에서 고문받다 사살되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김정일 사망소식을 한참 지나서야 안 이유도 이 휴민트 요원들이 숙청되어서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건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직접 휴민트 요원 250명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남한에 있는 북한 간첩에 대해 받은 자료가 전혀 없다.
 
1. 대남비서 김용순(김정일 최측근) 사고사로 위장 암살
2. 북한 농업상 서관히(북한내각 실권자) 남조선 간첩 혐의로 공개 총살
3. 장군 임태영 상장(북한군 지도 총국장) 남조선 간첩 혐의로 총살
4. 장군 우명훈 중장(북한군 총참모부 국강) 남조선 간첩 혐의로 총살
5. 장군 이상일 소장(북한국 64 저격 여단장) 남조선 간첩 혐의로 총살
6. 그밖의 인사들 다수 (북한군, 북한 내각내)
 
2010년 이후 황장엽의 증언으로
김용순 대남비서는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황장엽 뜻을 같이한 동지로 밝혀졌고
서관히 농업상 같은 경우 김일성 빨치산 동지로서 황장엽과 뜻을 같이해서
황장엽의 아들 황경모와 함께 김정일 암살계획을 세우게 됨
실제 서관히는 한국 간첩으로 발각 공개총살에 처해졌음
북한군 장성들 같은 경우
한국의 대표적 휴민트로 활동 하였음
지난 19681.21사태때 이들 휴민트 공작에 들어가
기나긴 오랜시절동안 북한내 휴민트를 육성해왔고
임태영, 우명훈, 이상일 또한 북한군부내에서 휴민트로 활동했음
하지만 19982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이후
그외 2000년 초중반까지 북한 내각 참사등 한국의 휴민트는 무참히 처형 되었음
결국 이 시기에 대북 휴민트는 대부분 무너짐
그 해 4월부터 국내에서는 국정원, 기무사, 검찰 공안과 등에서 간첩잡는 정예 요원들이 대거 해고되고 시작했고
(984월부터 9812월까지 국정원 직원 900여명, 대공 경찰 2500,
기무사 정보요원 600, 공안 검사 40명을 해고하는 등 대공요원 3000명 해고)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199810월 임태영 등 우리가 북한에 심어놓은 250명 이상의
휴민트가 일거에 잡혀 총살되었음
 
 
 @@@@@@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김대중의 정체(16인)
 
1. 1980년 광주인민봉기가 한창이던 때에 우리는 북한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생생하게 방영되는 5.18광주현장을 보면서도 저들끼리 물고 뜯고 잘도 싸운 다라는 식으로만 생각했지 별다른 의미를 두거나 특별히 다른 해석을 하지 않았다. 김정일 정권이 선전하고 말하는 그대로 전두환 군사깡패와 남조선 괴뢰정권을 뒤집어엎고 조국을 통일시키기 위한 영웅적인 남조선인민들의 애국항쟁이라고 의심 없이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김대중을 비롯해서 김일성. 김정일의 추종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북한과 긴밀히 내통하여 일으킨, 폭도들의 국가전복을 위한 반란이라는데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증언1. 교육자의 시각에서 본 5.18사건, 함경남도 금야군 고등중학교 교원)
2.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광주인민봉기가 차질 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 이였다(증언2. 북한군건설여단 33명의 떼죽음 속에 숨겨진 광주의 비밀, 전 함경북도 무산군 도시건설사업소 노동자. 제대군인이 광주에 왔던 공화국영웅의 비밀기록에서 발췌)
3.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5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증언3. 한국군은 광주의 살인자가 아니다. 북한군 항공사령부 소속 여성고사포중대 중대장)
4.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들이 미주통일신문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들을 보면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무조건 김대중과 김일성이 야합하여 친북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낸 사건이고 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자체가 어떤 면에서도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광주사태가 남한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증언5. 5.18에 숨겨진 진실, 박 행운, 전 북한군 하사관. 전 북-중 국경세관 검사.)
5. 또한 1만 톤 프레스와 같은 이름 있는 대형기계에 까지도 5.18광주무장폭동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을 만들어 냈습니다.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216,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증언6. 70대 노인이 말하는 광주사태, 전 북한 공장 지배인)
6. 특히 북한에서 전라도 광주를 가장 적당한 전략적 요충지로 선택하고 국가전복을 위한 작전을 시도한 것은 광주가 일본시대부터 반항정신의 발원지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참작이 있었지만 김대중의 기반과 영향력이 그쪽지역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는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북한군 3군단 사령부 조직부지도원은 광주사태는 분단이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통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우리가 그 좋은 기회를 아쉽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때 소규모적인 방법으로 광주사태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작전을 만들었다면 벌써 통일이 되였을 것이다.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도 그때 일을 가지고 두고두고 후회 하고 계신다고 우리 앞에서 이야기 하였다.(증언7. 5.18광주사건과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 전 북한군 서해안 방어부대 군관. 중위)
7. 오늘날 탈북자라고 하는 북한이탈 세력을 북한내부에서 부르는 그대로 반김정일, 반체제 세력이라고 지칭한다면, 북한의 사주를 받고 광주폭동을 일으켰던 김대중을 수괴로 하는 5.18의 주동세력도 동일한 범주에서는 똑같은 대한민국의 반국가적인 세력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속아서 끌려나왔다가 억울하게 죽은 광주의 선량한 시민들은 죄가 없을뿐더러 국가적으로 더 큰 보상을 받아야 되겠지만 북한이 동지이고 민주인사라고 우대하며 내세워주는 김대중과 같은 광주사건의 주동분자들은 반드시 국민적인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증언8. 광주의 살인자는 북한군이에요, 전 함경북도 청진시. 가정주부)
8.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한 영웅 전사들의 유해가 광주의 5.18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든든히 지켜주고 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통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고 있는 그들(김대중을 비롯한 남한의 지하세력들)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되고 있다고, 에돌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북한이 5.18에 개입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한은1968년 남조선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서도 아까운 전사들의 목숨을 잃은 사건이라고 공개적으로 사건 전말을 밝히었다. 심지어는 청와대 인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십 여 명의 북한쪽 무장인원들이 괴뢰군들의 총탄에 맞아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나머지 일행 중 두 명이 박정희 집무실까지 뚫고 들어갔는데 박정희가 얼마나 급했던지 금방 피우고 있던 담배를 끄지도 못한 채 재떨이에 버리고 도망을 갔다고 내용을 만들어서 선전하는 정도였다.(증언9. 5.18은 북한의 투쟁구호, 문천제련소 노동자)
9.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작전지역은 서울이었고 김대중의 지휘로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시위에 합류하여 배후교란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조선의 수도인 서울중심에서 국가교란사태를 조종하여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번질 수 있는 뇌관으로 되게 하는 것이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임무의 기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증언10. 보위부 반탐과장의 고백, 전 러시아 벌목공)
10. 김일성은 남조선혁명에서 첫 단계는 북한식 사회주의 형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가 그것을 계기로 김대중과 같은 남조선의 민주인사가 정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비 전쟁의 방법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증언11. 5.18광주와 북한, 전 조선작가동맹 작가)
11. 김일성과 김대중이 짜고 친 고스톱에 의해서 역사에 길이 빛날저주스럽고 가증스러운 광주봉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이 광주봉기 후에도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이상의 글에서도 우리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김일성은 조국통일을 성스러운 우리민족최대의 과업이라고 떠들어 대면서 5.18광주봉기를 조작하였고 숱한 북한군특수부대군인들을 개입시켜서 한 나라 한 강토에서 한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끼리 있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일을 저질러 놓은 민족의 원흉이고 원수입니다. 김일성의 지령에 의하여 북한군이 개입하여 일으켰고 그들이 말하는 조국통일을 위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광주무장폭동이었는데 어떻게 돼서 그것이 뒤 바뀌어서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 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화운동이 아닌 것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켜 가지고 단물을 빼먹고 있는 어리석은 친북좌파들을 이 땅에서 깡그리 청소해내야 합니다. 김일성과 김대중의 조작에 가세하고 놀아난 폭도들의 난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우겨대는 자들은 대한민국국민의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태껏 심적 증거만 있고 물적 증거는 없다는데 토를 달고 우기던 사람들은 광주봉기에 직접 침투 되었다가 지금은 한국에 와서 둥지를 틀고 조용히 살고 있는 한 탈북자의 산 증언을 똑바로 들어야 합니다.(증언12. “광주의 영웅내 친구의 아버지, 북한 김형직사범대학 학생)
12. 나는 5.18광주봉기는 민주항쟁이 아니라 김대중의 친북좌익집단과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북한 특수부대들이 야합하여 일으킨 폭동이라고 인정한다. 5.18당시 북한정권과 연결된 남한의 지하조직들이 무장폭동을 민주화로 위장하고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유인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삼척동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김대중을 괴수로 하는 친북좌파세력들이 그들의 억울한 죽음위에 민주화라는 가당치도 않는 깃발을 꽂아놓고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면서 백주대낮에 반국가적인 책동을 노골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들은 바도 많고 충분히 알고 있다. (증언13. 5.18광주폭동의 살인마는 김정일이다. 북한 3.13공장 지배인)
13.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한민국국민들은 북한체제를 흠모하고 동경하는 친북좌익세력들이 광주의5.18민주화운동으로 포장한 사실에 대해서 이제는 알 때가 되었고 친북좌익의 대표적인 아버지라 불리는 호남의 영웅 김대중은 반역자요, 자유대한민국체제 안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국가적인 장애물이라는데 대해서 충분히 인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증언15. 대학시절부터 알고있는 5.18광주의 무장폭동, 남포시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
 
14.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 -경기 광명 신모씨(67)-
 
위 증언집과는 별도로 통전부 요원탈북상좌가 김대중에 대해 확실한 증언을 했다.
1. 2005년 월간조선1월호에는 제3국에 체류하는 전직 통일전선부(대남공작부) 요원의 충격적인 폭로내용들이 게재돼 있는데 여기에는 386주사파는 통전부의 정규군이고, 우리는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로 불렀다는 머리글도 있고, “김정일이 당시 송호경(2000년 남북정상회담 준비역)에게 지시하기를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라는 내용이 있다.
2. 중앙선데이2011.12.25자 보도를 통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19984월부터는 남한의 대공 공작 및 수사관 수천명(국정원 대공요원 900 대공경찰 2,500, 기무사 600, 대공검찰 40)을 무더기로 내보냈고, 이어서 9월에는 북한에 우리가 길러놓은 우리 측 간첩 250 정도를 숙청했다는 것을 밝혔다. 이 숙청된 사람들 중 2명은 김신조 사건 때 북한에서 출세해 우리에게 충성하라고 보내준 사람으로 각기 2(우명훈) 3(임태영) 장군이었다.
2012.7.30. 지만원http://www.systemclub.co.kr/
 

@@@@@@  김대중 출생비밀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자유 게시판

빠꼼이 | 조회 2061 | 09.09.02 18:40 http://cafe.daum.net/parkgunhye/U8YZ/368876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
씨의 아버지는 좌익에게 피살되고, 씨는 金大中씨를 돕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
金大中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조사는 엉뚱한 비밀을 드러내었고,
그는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末年출생의 비밀이란 그늘 속에서 스러져 갔다.
死因은 심장마비
 
月刊朝鮮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생전의 孫昌植.
 
20041125일 오후 1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20.

亡者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金大中 前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金大中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孫昌植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家系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客死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金大中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朴正熙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5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氏가 아니라 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金海 金氏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金山祭19805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金大中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중략)

이날 아침 大祭가 열린 興武王陵 앞에는 金大中아닌 尹大中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金大中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姓氏 문제는 金大中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姓氏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金大中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政敵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金大中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金大中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金大中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孫昌植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孫貴峰)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씨 아버지는 씨가 태어난 지 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 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大選 金大中 후보를 돕다

완도중학을 졸업한 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光州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씨는 1968년 조선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누이를 통해 들은 것이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생인 그는 실의에 잠겼다. 못 배운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 죄가 되고, 6·25 전쟁 중에 좌익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4H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완도군 4H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엔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 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金善太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金善太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스물세 살이었던 씨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金善太씨 보좌역이 되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씨는 공화당의 朴正熙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가 家産을 온통 쏟아 부은 해태 사업도 망해 버렸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그는 친지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1972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大邱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對日 홀치기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를 구하기 위해 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油公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油公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郡守 월급이 1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大邱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巨金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家産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 그는 金善太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金善太씨가 梁一東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金相賢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金大中씨가 씨가 아니고 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李姬鎬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 장갑

결심은 했지만 씨는 바로 金大中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光州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光州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李京植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金弘一·韓和甲·金玉斗·咸允植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씨는 정통 동교동맨은 아니었지만 光州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李姬鎬 여사가 아들 金弘一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李姬鎬 여사는 저에게도 光州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 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보냈더니 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金弘一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社報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대변인을 맡았고, 1985民推協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 1987년 후반, 몇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에서 金大中씨의 실제 아버지는 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孫昌植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金大中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全斗煥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金大中家系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金海 金씨로 金大中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金敬仁 前 의원은 金大中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木浦에서 8,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씨는 19884,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金大中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村老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金大中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金大中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金大中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金大中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金大中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金大中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金大中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 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金大中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木浦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金大中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성조

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金大中 대통령의 생모는 張鹵島(장노도·나중에 장수금으로 개명)라는 분인데, 1893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에서 張之淑의 장녀로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호적에 따르면 그분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11년에 하의면 大里(대리)에 살던 諸葛成祚(제갈성조)라는 사람과 혼인을 하는데, 이 남편이 요절하였습니다.

문제는 金大中 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諸葛成祚의 호적 서류가 법원과 면사무소 양쪽에서 모두 폐기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하는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본적지 관할 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할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張鹵島諸葛成祚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하의면 사무소에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제적부에 남아 있습니다.

호적은 맨 첫 장에 호주 이름이 나오고 이어서 출생순서에 따른 자식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諸葛成祚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諸葛成祚 부친 호적에는 諸葛成祚 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묘하게도 諸葛成祚 부분만 毁棄(훼기: 특정 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음)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諸葛成祚 부분만 찢어 버린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張鹵島諸葛成祚, 諸葛成祚가 죽은 뒤 張鹵島가 그의 부친 張之淑 호적에 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저는 하의면을 관할하는 光州지방법원 木浦지원에서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호적 원부 및 除籍(제적) 원부에 대해 인증 등본을 신청하였습니다.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 중인 서류가 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신청에 대해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諸葛成祚에 대한 서류가 폐기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경우,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호적서류가 법원에서는 폐기해 버렸고, 면사무소에는 부친 제적부에 일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張鹵島1925년에 아버지 張之淑 호적에 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金大中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張之淑에 의해 檀紀(단기) 4257(서기 1924)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생모 張鹵島1960년에 金云式과 혼인하면서 金云式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張鹵島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諸葛成祚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諸葛成祚 사망 후에서 시작해 張鹵島가 친정 호적에 재입적되는 1925년까지가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을 둘러싼 미궁의 세월입니다.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대통령 문중 사람에 따르면 대통령은 돼지띠(1923년생)라고 합니다. 대통령 본인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朴正熙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며 돼지띠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호적을 보면 알겠지만, 기재 내용을 정정하는 도장이 무려 아홉 개나 찍혀 있는데, 이것만 봐도 출생 내막이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왼쪽 사진 참조).

하의도 일대 村老들에 따르면 대통령이 출생하기 얼마 전에 張鹵島는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차렸답니다. 이 주막집에서 대통령이 출생했습니다. 하의도에 지어 놓은 대통령의 生家가 이 주막집입니다.

주막집 시절에 金 前 대통령의 어머니는 모씨와 상당 기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어릴 때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대통령 어머니는 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金云式을 알게 되었고, 金云式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金云式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金云式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金云式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13녀를 두었는데 장남 大本(호적상 이름은 大本인데, 비석에는 大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대통령의 생모 張鹵島 집안 사람과 張鹵島호적상 첫 남편諸葛成祚네 사람들, 그리고 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金云式 문중 사람들과 張鹵島와 일시 동거했던 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 60년대에 하의도 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金大中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張鹵島가 아들을 낳자, 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대통령 호적에는 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金云式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金大中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씨니, 씨니, 諸葛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金云式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大本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金云式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金大中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金大中씨 어머니를 위해 木浦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金云式 어른입니다

金云式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金云式씨의 큰아들과 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金云式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張鹵島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金大中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大本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木浦에 있던 金大中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金大中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大本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大本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金云式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金大中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張鹵島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李姬鎬 여사)가 봉투에다 몇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대통령은 어머니가 金云式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씨가 맞겠네요.

씨 친척 분을 만났더니, 씨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金大中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金大中)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諸葛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諸葛씨라고 했고, 金海 金씨 문중 어른들도 諸葛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諸葛成祚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諸葛成祚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金大中씨라는 것이 金海 金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諸葛씨라는 것이지요

諸葛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諸葛 家()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張鹵島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諸葛成祚의 형이 金大中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諸葛씨 사람들은 지금도 하의도에 살고 있습니까.

諸葛成祚의 형은 1958년에 고향을 떠나 내륙 모처로 이사갔습니다. 제가 그곳까지 찾아가 그분 후손들을 만났지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증언자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까.

1999년 정초에 네 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金弘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다

씨는 金大中 출생비밀의 탐사작업을 기록한 녹취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취록에는 씨가 만났던 사람들이 A노인, B씨 등 익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 옆에는 성별, 나이, 만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이 녹취록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제가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확인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 행여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실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하의도 일대가 워낙 작은 동네이다 보니 금방 소문날 것 같았습니다. 사투리는 가능한 살렸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취재원 보호를 위하여 옮기지 않았고요. 녹취록 원부는 CD(콤팩트 디스크)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 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저는 1심 재판에서는 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 측에서 제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저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증거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마 재판부로서는 이 점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金大中 출생비밀에 대한 탐사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교동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작업의 결과를 혼자만의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에게 直言하여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목포에 거주하던 하의도 출신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金海 金씨 문중 사람 중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金大中씨는 諸葛씨라고 하는 말에 격분해 그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그 뒤 동네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고 어른들께 사실대로 바로잡자고 건의했다가 야단맞은 일도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이 문제는 본인과 무관한 부모 책임이다. 따라서 金大中씨 스스로, 우리 어머니는 참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라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쩌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실체에 접근할수록 본 궤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해답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갈등 끝에 저는 대통령의 큰아들 金弘一씨를 만났습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金大中씨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난 이후입니다. 동갑이고, 대전형무소 감방 동기였던 그에게 제가 조사한 얘기, 들었던 얘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金大中 선생은 대통령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정도는 밝히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습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동교동의 장벽은 참으로 높았습니다


金大中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

당시의 심정을 씨는 녹취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金大中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왔던 金大中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담했다. 全斗煥, 金鍾泌 金大中 선생의 政敵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두려웠다.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人物史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 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金大中 선생이 을 한다고 해서, 아니 을 안 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 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돼 있는 金大中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꼬기가 아닌가.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때로는 봉변도 당했고, 기관원들이 눈치를 챌까 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였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家長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 볼 낯도 없었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金大中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 버렸다>

이 탐사작업을 통해 씨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씨가 아니고 諸葛씨란 사실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소식지에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직접 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썼어요. 한길연구회 간사장 겸 한길소식지 편집인이었던 저도 원고를 보지 못했습니다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까.

7개월 동안 열여덟 번 검찰에 불려 나갔습니다. 조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야간에 출두하라고 했어요. 담당 검사가 金海 金씨였는데, 제가 조사한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담당 검사는 출생의 실체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저보고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기소 만기일인 1998618일에 저를 기소했습니다

1심 첫 재판은 1998714일 오후 4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 8시에 열렸다.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였다. 서울형사지법 319호 법정의 방청객은 씨의 친구인 李京植씨와 趙福衡씨가 유일했다. 이날 재판에서 씨는 冒頭(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不敬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金弘一 의원의 측근이며 씨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씨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돈과 자리를 제의하며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해요. 돈도 10억인가 20억을 준다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명예훼손 사건이니까 부터 취하해 달라고요. 세 번인가 찾아왔는데 취하를 안 하니까 계속 재판을 한 겁니다


혼자서 재판 준비

재판을 받는 심정이 어땠습니까.

첫 재판 기일을 통고받은 뒤, 이틀인가 사흘일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어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놈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저를 속이 없는 사람으로 봤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원칙대로 살아왔으니까 꿀릴 게 없었어요

변호사는 누구였습니까.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참 웃기더라고요. 25년을 야당생활하면서 제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입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저의 일이었으니까 세칭 인권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맡지 않았으면 하는 낌새더라고요.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수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거절한 것 아니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습니다. 法大 출신인 李京植 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습니다

법정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후 4시에 시작한다고 하고는 밤 10시에 개정하는 재판은 처음 보았습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렸지요. 오후 7시나 8시쯤 재판이 시작돼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어요. 텅 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으니까요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계기

증인 신청도 했습니까.

金鍾泌씨와 全斗煥 前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지요.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金海 金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金鍾泌씨였기 때문이고, 全斗煥씨는 金大中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氏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재판부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심 재판장이 대구 분이었어요.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 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뎁니다.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저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1심 때는 金弘一 측 사람이 저를 찾아오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을 재판장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고 나서 재판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습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재판을 하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선고를 하는 겁니다. 그 후 재판장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1심과 똑같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증인들과 제가 제출한 증거들을 재판부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審理(심리) 미진과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상고했는데, 대법원에서 역시 기각했습니다. 제 사건은 19991026일 종결되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大中 정부가 왜 저를 기소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 친구나 친척,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金大中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씨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제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습니다.

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金大中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제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게 응해 준 그들의 눈망울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증언자들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2세나 3, 4세에 미칠 파장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제가 했던 일은 제 뜻과 다르게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숨길 게 없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金大中 대통령에게도 불행입니다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갔습니까.

金泳三 정부 시절에 광주사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저도 몇 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살았습니다


하의도를 찾아가다

2001년 여름, 기자는 孫昌植씨의 탐사 작업을 검증하기 그와 함께 하의도를 찾은 적이 있다. 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金云式이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金云式은 문중의 종손이었지만 처가 두 사람인 관계로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집 뒤의 산에 묻혔다. 金云式 묘를 바라보고 왼쪽에 그의 본부인 金順禮 묘가 있고, 그 오른쪽에 張鹵島假墓가 있었다.

金云式-金順禮 묘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金云式-張鹵島 묘 사이는 그보다 훨씬 간격이 넓었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본부인보다 묘 사이의 간격을 더 두는 게 옛날 풍습이다.

金云式 묘는 破墓(파묘)가 되어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었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경기도 龍仁으로 옮겼다. 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金云式-張鹵島合葬(합장)하고,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金云式 묘소 바로 위에 대통령의 배다른 형 金大本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서 있는데 앞에는 金海 金公 大奉之墓(김해 김공 대봉 지묘)라 쓰여 있고, 뒤에는 弟 大中 追慕 奉立(제 대중 추모 봉립)이라 새겨져 있다. 동생이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묘 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핍박했으니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 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孫昌植씨는 光州 5·18 묘역에 묻혔다. 기자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碑文을 썼다.

<30대의 그는 기업인이었고, 40대의 그는 민주화 투사였다. 그는 富貴榮華 대신에 신념을 위해 살았다. 故人의 진지한 삶에 대하여 많은 민주화 동지들은 경의를 표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