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3일 토요일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증거

http://blog.daum.net/andyhugk/2409977



광주사태와 북한군 부분적 개입증거


<북한의 5.18 관련 기념물들>




<임천용 씨 인터뷰 기사>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지난해 연말 기자회견을 갖고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김정일 정권이 북한군특수부대요원들을 대거 침투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5.18 관련 단체들이 즉각 반박 긴급성명을 발표하면서 갈등이 갈수록 첨예화 되고 있다. 두 단체간의 설전은 점차 진실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자 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에 대해 5.18민주화 단체들은 “이들 주장의 내용은 그 진위 여부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가지도 없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5.18민주화운동유공자들의 명예는 물론,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지난 수십년 동안 노력해온 국민들의 피와 땀을 욕되게 하는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반박하고 있다. 현재 5.18민주화단체들은 자유북한군연합을 상대로 법적대응을 강구하고 있다.

5.18민주화 단체들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지난 1월 23일 ‘5.18관련 단체들은 김정일 정권을 광주의 민주투사로 둔갑시키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공개답변 서한을 내놓았다. 이 공개서한을 통해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김정일 정권이 광주항쟁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요원들을 침투시켰다고 재차 강하게 주장했다.

27 년 전 5.18 광주항쟁 당시 야만적인 신군부 독재정권의 계엄군을 상대로 봉기한 광주시민의 항거는 이 땅의 민주화 역사 속에 그 어떤 논리로도 훼손될 수 없다. 광주 망월동에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안고 산화한 민주열사들의 영령이 잠들어 있다.

그 러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긴 광주항쟁 민주열사들의 숭고한 넋이 이 땅의 민주화 역사 속에서 온전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유북한군연합이 주장한 김정일 정권의 개입설은 진실 규명 차원에서 밝혀져야 한다. 그래서 뉴스한국은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의 인터뷰에 이어 5.18민주화 관련 단체와도 인터뷰를 계획하고 있다.

뉴스한국은 지난달 31일 서울 정동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연합 임천용 대표와 인터뷰를 가졌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1999년 12월 탈북했다. 탈북하기 전 그는 북한군특수부대 교도지도국 19여단 2대대 상위(대위)였다.

임 대표는 “5.18 광주항쟁이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봉기한 그 뜻을 인정한다”면서 “그러나 당시 김정일 정권이 정예의 북한군 특수부대요원들을 시민군과 계엄군으로 나뉘어 침투시킨 정황과 증거가 명백하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했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측은 작년 연말 기자회견에 이어 지난 1월 23일 또다시 ‘5.18 관련 단체들은 김정일 정권을 광주의 민주투사로 둔갑시키지 말라’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 유북한군인연합이 주장한 5.18 광주사건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요원들이 대거 침투하였다는 지난해 기자회견(2006.12.20)과 관련하여 5.18 관련 단체들이 우리 주장을 남한 민주주의 발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반사회적 책동이며, 배후세력의 조종으로 날조되고 조작된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우리를 공격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5.18관련 단체들의 긴급성명을 검토했고, 그 결과 5.18 관련 단체 역시 우리가 주장하는 진실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답변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5.18민주유공자회, 5.18민주화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등 세 개의 단체에서 우리의 기자회견 이후 긴급성명서를 내놓은 것을 보니까 주장하는 내용의 요지는 단 하나였다.

광 주문제가 법적으로 민주화가 인정된 문제라는 것과, 우리가 지난 연말 기자회견에서 제시한 사진들에 대한 반박이었다. 또 우리의 주장을 반사회적인 책동을 기도하려는 의도라며 배후자들이 있다고 몰아세우고 있다.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광주학살의 주범을 김정일 정권이라고 폭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사회적 책동자가 되고 불법행위자들이 될 수 있는가.

5.18광주항쟁 당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초기부터 투입되었는가

그 부분에 대해 확실히 판단하는 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광주사건이 터진 뒤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광주사건의) 중간에 개입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광주가 터지기 전에 터질 것이라는 보고는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김정일은) 김중린(70세. 현 北노동당비서 서열21위)을 거쳐 정찰국 5부장 하던 이하일(59세. 전 노동당 군사부장 은퇴 추정)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하일 그 사람 북한에서 유명했다. 북한에서 그 사람을 ‘적공’이라고 부른다. 대남 사업에서도 ‘종심(從心)’이라고 무장간첩 집단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현업(특수부대요원의 실제 작전투입)을 움직였다. 예를 들면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이승복 사건 등을 일으킨 특수부대를 움직이던 사람이다.

광주 문제가 터지기 전에 김일성, 김정일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김일성이가 당시 루마니아 등 유럽 방문 예정돼 있을 때 이 자료는 대남사업부에서 나온 말이다.

황 장엽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한마디 열어야 되는데 그 양반도 우리 앞에서는 시인하고 거기 있을 때(북한에서)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또 한 사람(탈북자)이 있는데 이 문제를 남한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나서기를 주저한다. 그 사람이 증언하지 못하도록 국정원에서 막고 있는 것 같다.

(김정일 정권이 광주항쟁에 개입한) 자료들은 북한에 상당히 많다. 광주 문제 북한군이 개입했던 자료가 실제로 80년대 중반께 인민군 특전사 부대에서 광주문제에 대한 문제가 합법적으로 내려왔다.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이쪽(남한) 사람들을 성향을 볼 때 무지해 보인다.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상당히 답답하다고 느낀다.





1980 년 5월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광주시민을 상대로 자행한 야만적 폭압의 순간. 그러나 광주항쟁이 터진 것을 틈타 북한 김정일 정권이 정예의 특수부대요원들을 광주로 침투시켰다고 말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도 반드시 규명돼야 할 문제다. ?




5.18광주항쟁 당시에 북한군 특수부원들이 투입되었다는 증거는 모두 북한에 있고, 남한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제시할 만한 직접적이고 명확한 증거자료는 없는가

현 재는 남한에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 못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아직 언론에 공개하기는 힘들지만 북한에서 (확실한 자료) 하나 더 가져 올 것이 있다. 그 때는 부인하지 못할 것을 들이댈 것이다. 그 때는 더 이상 말장난이 아니다.

(김 정일 정권)이 남한에 내려와서 죽은 특수부대원들의 시체는 못 가져갔지만 북한에는 그들의 빈 무덤들이 있다. 김신조 부대 청와대 습격 왔다가 죽은 사람들도 북한에 빈 무덤이 다 있다. 김신조 부대 소속으로 여기서 죽었던 ‘함장건’이라고 청와대 습격했던 사람이다. (북한에 있는) 이 사람의 빈 무덤 묘비에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열사 장렬히 전사 1968년 1월…’라고 적혀있다. 그의 동생 ‘함장관’은 80년 광주에 내려와서 죽었다. 형제의 묘가 고향에 있다.

광주사건에서 죽었던 특전사 부대원들의 무덤에는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적후에서 장렬히 전사 1980년 5월…’라고 씌여 있다. (북한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대외적으로 공개돼 있는 것이다. 이게 거짓말인가.

남한에서 침투했다가 사망한 북한군인의 무덤을 본 적은 있는가

그 건 확실히 봤다. 각 고향들에 다 있다. 함장관과 함장건은 내가 왜 잘 아는가 하면 그 사람 우리 동네사람이다. 여기 왔다가 죽은 함장관은 북한에서 상당한 우상이었다. 그 부모들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이가 다 만나고 김일성이가 부하들이 남조선 혁명에서 다쳤다고 훌륭한 우리가 아들들을 대신해서 부모님들을 공경하겠다고 김일성이 그 말을 했다. 김일성이 한 가정에다 대고 발언을 해주면 가정의 큰 대들보다, 가보다. 그 발언 효과가 오래 간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 자료를 이쪽 (남한)으로 가져오는가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 북한에 있다.

북한 내부에 활동 중인 사람들이 있는가

우 리(자유북한군인연합)는 북한 내에서 항거하는 반정부 무장단체다. 공식적 명칭은 북한 해방군이다. 이 문제(광주항쟁 당시 북한 특수부대 투입 규명 문제)는 우리가 답답해서 다루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닌데 다른 탈북단체는 이 문제를 다룰만한 뱃심이 없어 우리가 다루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북한특수전부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한 내로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그렇다. 마음만 먹으면 정도가 아니라 내려오려면 금방 내려온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수가 얼마인가. 한국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에 교도지도국이라고 있다.

여기에서(남한에서) 특수8군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교도지도국이다. 교도지도국은 (세부적으로) 각 병과 별로 탱크지도부, 포지도부, 경보지도부로 나뉜다.

경 도지도부만 해도 여기(남한)에서 전부 12만 명밖에 안된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계산이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12만 명이 훨씬 넘는다. 북한의 특수부대 체계가 상당히 광범위하다. 내가 알기로 남한 특수부대는 일곱 개로 알고 있고, 다 돌아 봤는데 북한보다 상당히 열세하다.

남한 특수부대원은 대체로 신장이 크고, 다루는 무기 수준도 북한에 비해 좋다. 그러나 훈련하는 것, 훈련의 질을 비교하면 북한과 비교가 안 된다. 북한은 훈련을 현장에서 한다. 현장에서 굶어가면서 교육받는다. 그런데 여기는 너무 잘 먹고 배부르게 훈련한다. 북한 교도지도국 인원만 우리가 알기로 15만 명 정도 된다.

그리 고 북한 인민군은 각 군단마다 2개의 특수여단이 있다. 또 각 군단에 완전히 정예화된 정찰특수정찰대의 한 개 대대가 또 있다. 그 다음에 사단 산하에 일개 특수대대가 있다. 그렇게 보면 북한에 사단이 100개 사단이 있다. 이를 모두 집계하면 북한의 특수부대원은 상당한 인원이다.

이렇게 집계하면 20만 명이 훌쩍 넘어간다. 북한 특수부대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그 무력이 남한 종심에 매달리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서 광주문제가 다시 한 번 터진다면 그땐 남한이 감당 못한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정신적인 훈련, 즉 ‘수령을 위해서는 죽어도 된다’ 또는 ‘죽는 게 영광이다’ 식의 사상의식이 완전히 세뇌되어 인이 박혀 있다.

북 한 특수부대원들은 일반 명령을 둘째 치고 훈련 중에 수류탄의 고리가 뽑혀져 떨어질 때 눈치 볼 새 없이 서로 덮친다. 죽는 순간에 ‘장군만세 수령만세’ 외친다. 이런 식으로 죽으면 김정일 TV도 보내주고 선물주는 것을 사회적으로 하니까 그렇게 죽는 것을 상당히 값어치 있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죽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쓴다. 이게 상당히 무섭다는 것이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지금 광주문제 다루는 것 사실은 오기라면 오기로 다루는 것이다.

사 실 오기가 없으면 못 다루는 것이다. 나도 오기로 밀어 붙이고 있다. 잘못하면 내가 죽는데 만약에 광주문제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남한에도 북한에서 침투해 있는 사람이 많다. 시시때때로 내 주위를 맴도는 북한 특수조가 있어 보인다. 저번에 등산간 적이 있었는데 나하고 같이 간 분이 계속 우리를 따르는 두 사람이 있다 길래 쳐다보니 피해가 버렸다. 이런 일들을 남한에서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광주문제에 대해 확신이 없고 자신이 없으면 손대지도 못하고 손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김 정일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 펴낸 ‘광주평록’이라는 책이 발간돼 있다. 그 책에 “우리는 광주에서 크게 얻었지만 노칠 것은 놓쳤다. 하지만 내일을 위해 남겼다”라는 김정일의 발언 내용이 들어 있다. 광주 문제에 의도적으로 상당히 관심이 컸다는 뜻이다.

김정일은 광주봉기가 있던 바로 그해 1980년 10월 12일에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 시점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치일선에 등장했다. 당시 김정일은 “광주는 성조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라고, 좀 더 큰 선물 드려야 하는데 아쉽게 되었다”고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북한정권은) 1970년대 중반부터 대남사업문제를 김정일이 사실 배후에서 총괄했다. 김일성은 70년대 중반부터 대남사업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대남사업은 김정일이 총괄했다. 광주문제도 김정일이 총괄했다.

북 한 통일전선부라고 거기 직원으로 있다가 탈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 있다. 우리는 통일전선부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그곳 직원으로 일했던 이 사람은 통일전선부 지하실 대남자료 전시실에서 본 것이 광주 사태 때 북한군이 투입됐다는 자료가 일체 전시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은 평양 용선구 용춘2동에 있는 대남사적관에는 북한군이 1950년 이후에 남한에 내려와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남한에서 벌인 일체 자료와 작전내용들이 그 대남사적관에 다 있다. 그 곳에서 제일 비중 큰 전시물이 광주문제이다.

5.18광주항쟁 당시 북한특수전부대원들이 몇 명이나 투입됐는지 아는가

우 리가 알고 있기로는 600명 정도 됐을 것이다. 서해안 남포에서 ‘뜨락선’이라는 고깃배로 원양어선을 타고 내려왔다. 황해남도 신천에 있는 복수여단이라고 있다. 이 여단은 상당히 유명한 부대다. 이 부대는 인민무력부 소속이 아니다. 별도의 특수 여단인데 정말 고강도 훈련만 받는 부대이다. 이 부대에서 1개 대대가 차출되어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각 특전사부대들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차출한 300명 정도는 별개로 함경남도 신포 동해안으로 마양도라는 잠수함기지에서 내려왔다.

동해와 서해로 양쪽으로 내려왔다는 말인가

동해 쪽으로 내려온 특수부대원들은 하루 만에 내려온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엔 서해 남포에서 잠입한 부대원들이 좀 더 빨리 내려왔을 것이다.











ⓒ뉴스한국




5.18광주항쟁 때 투입되었다가 살아 돌아간 북한군은 몇 명인지 알고 있나

그 것은 일반적으로 집계하지는 못한다. 우리 대대(임천용 대표가 복무했던 특수부대)에서 총 7명 내려왔다고 들었다. 4명 죽고 3명이 올라갔다. 4명이 다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 함장관이가 포함돼 있다. 북한에서 죽었다는 사람은 함장관이 딱 하나 나왔는데 나머지 3명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살아 돌아간 특수부대원들에게는 어떤 대우가 주어졌는가

공 화국의 영웅 대우 받는다. 북한에서 공화군 영웅을 발표하는 절차가 있다. 남조선에 내려와서 싸우다 죽었거나 돌아가 영웅이 된 사람들은 주로 아침 뉴스로 많이 발표한다. 방송으로 발표하는데 공화국 영웅 명칭은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발표한다.

북 한 내에서 남을 위해서 수류탄을 끌어안고 죽거나 남을 위해서 총에 맞아 죽으면 방송에서 엄청 떠든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죽은 사람들은 공식적 발표를 안 한다. 그냥 문서상으로 끝낸다. 남조선에 나가서 공화국 영웅됐다고 (방송으로) 발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공화국 영웅이 된)의 집이나 문서상으로 공화국 영웅으로 나온다.

(광주 항쟁 당시) 내려왔다가 정확히 몇 명 살아 돌아갔는지에 대한 집계는 다 틀리다. 복수여단 부대원들은 3분의 2도 되나마나 하게 돌아왔다. 타 특수부대에서 모집된 쪽은 절반이나 살아 돌아갔을 정도다. 최종적인 집계는 있을 것이다. 대남사업을 관리했던 이하일은 파악했을 것이다.

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갈 때는 어떤 경로로 돌아갔나

돌아갈 때는 거의 3차에 걸쳐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큰 무리는 먼저 서해안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공해상에 이하일이가 떠있었다. 배에서 현장지휘 했으니까. 60-70명 정도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었다.

이 사실은 우리 부대 쪽에서는 인지를 못했는데 중부전선을 넘어 갔다는 것은 타 부대에서 북한군 1군단에 있던 부대원들이 자기네 부대원들의 말을 인용해서 나온 것이다. 중부전선을 넘어간 특수부대원들은 1차로 배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로 광주봉기가 끝난 뒤 육로로 빠져나간 것이 가능했다. 대략 살아 돌아간 인원은 절반 정도라고 본다.

광주항쟁 문제와 별개로 남북 간에 전면전이 일어났을 때 북한 특수부대에 어떤 지시가 하달되는가

각 군단별로 정해진 대상 도시가 있다. 우리 부대는 청주였다.

지역별로 담당 부대가 다 할당돼 있다는 뜻인가

그 렇다. 우리 부대에서 내가 2대대였는데 청주였고, 1대대는 충주, 3대대 제천, 4대대 포항, 5대대 안동 이런 식으로 한 개 부대가 대상 지역을 한 개씩만 맞는 게 아니라 최소 3개의 특수부대가 1개 지역을 대상으로 맞는다. 청주의 경우, 우리 부대 말고도 임무가 같은 특수부대가 2개 특수부대가 더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청주에 3개의 특수부대가 떨어진다면 (남한에서) 감당 못한다. 1개 대상도시에 1개 북한군 특수부대가 떨어져도 상당히 방어하기 힘든데 1개 대상도시에 3개 특수부대가 투입되면 거 참 (방어하기) 힘들다. 그러나 서울시는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되지 않는다.

장사정포 같은 북한의 화력이 닿는 유효 사거리에 들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전시가 아닌 상태에서 별도의 특수임무는 가능 하겠지만 전시에는 특수부대 작전 모델은 없다. 대부분 제주도, 부산, 광주 등 이남 쪽이지 중부지구(수도권)는 특수부대 투입이 없다.

전면전 시 북한군 특수부대의 초기 작전은 어떻게 전개되나

우 리 대대가 맡은 청주에는 저수지가 있는데 (접수된 정보에 따르면) 저수 용량이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저수지를 폭파시킨다. 그 임무도 저수지 폭파조, 미사일 기지 파괴조로 할당된다. (이 지역에) 미사일 기지가 세군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곳도 일단 파괴해야 된다.

1차로 요인 암살이다. 시청, 시의원 간부들을 색출 암살한다. 사회 시설을 폭파시킨 뒤 지역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 다음으로 특수전에서 활용하는 뻔한 수법이 조작과 교란 등이다. 광주사태 때의 시체 문제와 같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조작한다. 그렇게 해서 내부를 와해시키고 조작해 혼란시킨다.

남한에 투입되기 전 대상 도시 주요 요인들에 대한 인물 조사는 사전에 끝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청주시청이라면 시청에 일하는 중진급 이상 간부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관공서 마다 암살해야 할 요인들의 자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매 해마다 바뀐다.

(이러한 정보들은) 남한에서 파악돼서 올라가는가

모두 여기서 파악돼서 올라가는 것이다.

남한 군기지 정보 역시 남한에서 파악돼서 올라가는 것인가

그렇다.

고정간첩들이 파악해서 올려 보내주나

고정간첩들이 자료 수집을 하거나 일명 ‘종심’이라고 불리는 단시간 내에 (남한에) 내려 왔다가 임무를 수행하고 올라가거나 여기 와서 자료를 가지고 올라가는 식으로 보면 된다.

종심은 단기 침투간첩을 말하나

그것을 종심이라고 한다. 이런 수집 자료들은 매년마다 (암살)대상들에 대한 자료가 계속 바뀐다.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고 이름이 바뀔 수도 있다. 이름까지 정확히 나와 있다. 가족은 몇 명인지 성향은 무엇인지 다 분석되고 있다.

북 한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수집해놓고 있다. 말하자면 광명시라고 하면 시청, 광명경찰서, 행정기관들은 일률적으로 자료가 집계되어 있다. 그렇게 수집된 자료가 없으면 작전을 못한다.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시장을 암살하고 싶으면 시장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암살한다. 1차로 행정기관, 관공서 간부 암살하고, 국가시설 폭파해서 지역 교란 일으킨는 것이 북한특수부대들의 기본 임무다. 북한 특수부대마다 지리적으로 배정이 다 되어 있다.

종심을 활용한 단기 대남 침투 간첩의 활동은 빈번한 편인가

빈 번한 편이다. 해상이든 육지든 종심을 하는 데는 여러 군데다. 남한에서는 딱 한 개 기관에서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니다. 대남사업부라는 데가 유일한 큰 기구다. 그 곳에서 별도로 내려 보내는 부대가 있다. 또 통일전선부에서도 간첩관리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도 간첩 다룬다.

그러나 대부분 군대 쪽에서 내려 보낸다. 정찰부, 각 군단 첩보부 등이 있다. 1군단은 강원도, 5군단은 철원 앞이고 중부전선을 맡고 있는데 이 군단들은 자기네 전방에 대한 종심을 벌인다. 철원, 강원도 이 지역에 대한 종심 정찰은 군단 내 소속된 개체 부대에서 다 한다.

그 군단 안에 있는 두 개의 특수여단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렇다. 5군단이 강원도 철원 쪽으로 남침한다고 가정할 때 군단 내 특수부대는 후방 교란이 아니라 전방 교란을 목적으로 한다. 군단이 치고 나갈 길목에 그 곳을 침투해서 교란시키고 군단이 받아서 그 지역을 점령하고 또 앞으로 나가고 앞으로 진군하는 식이다.

군단 내 2개 특수여단은 그 임무다. 군단 작전을 보장하는 것이 주 임무다. 교도지도국은 후방 교란에 있다. 단기 간첩인 종심의 침투 경로를 말한다면 수십 개의 루트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단기 침투간첩들의 경우 남한으로 잠입했다가 며칠 묵었다가 돌아가는 식의 종심 침투는 북한에서 볼 때 상당히 빈번하다.

북한에 있을 때 보니까 남한 내 고정간첩이 만들어 놓은 자료를 받아오는 걸 많이 했다. 남한에서 수집된 각 신문들도 매일 들어온다. 공식채널로 들어오는 지 비공식 채널로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배달된다. 내가 북한 특수부대 있을 때 남한 신문을 매일 봤다.

마지막으로 자유북한군인연합과 임천용 대표 본인 소개를 한다면

북한 특수부대 대위 출신이다. 19여단 2대대 특전사 교관을 지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남한에서 초기에 탈북한 사람들 중에서 특수부대 출신들로만 만들어졌다.

중 국에도 우리 단체 회원들이 있고, 북한 내에도 있다. 우리 단체는 테러 단체는 아니지만 북한 내에서 (반김정일 정권을 상대로) 테러가 필요하면 테러를 할 것이다. 예전에 김정일 정권 지도부 사이에서 국제사회에서 거론된 북한 내 반정부 무장투쟁에 대한 지적이 나온 적이 있다.

이 와중에 80% 무장 항거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가 나왔다고 한다. 북한에서 김정일 정권에 항거하는 활동이 폭력이던 비폭력이던 상관없다. 물론 비폭력이 좋지만 비폭력으로는 북한 내에서는 전위 자체가 안 된다. 무장투쟁을 안 하면 북한에서 그 정권에 항거할 수가 없다. 김정일 정권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에서는 지금도 소규모 무장투쟁이 가능하다
    
 
출처 :K-Neocon 원문보기   글쓴이 : 7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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