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9일 금요일

아! 조선, 그 안타까운 나라여

! 조선, 그 안타까운 나라여
 
朝鮮末國運을 보여주듯이
안타깝지만 불국사는 폐허로 존재했다.
그것을 復元한 자는 우리가 미워하는 日帝였다.
1924년에 일제는 改修공사를 했고
1970년에 와서 비로소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어
3년간의 공사로 1973년에 復舊를 마쳤다.
 
조선말의 한반도는 그야말로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은 내 祖上의 나라이므로
그것을 폄훼(貶毁)하면 내 얼굴에 침 뱉기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反面敎師로서
나라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조선은 이성계가 建國하고,
世宗 때 비로소 王權을 확립하고 국운이 열렸다.
한글도 그때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文弱으로 흘렀다.
朱子學을 신봉하여
양반문화를 형성하고 계급사회를 형성했다.
이 양반세력들이 國富를 독점하고 백성은 피폐했다.
농경사회에서 곡물은 화폐나 다름 없다.
그래서 세금은 그것으로 낸다.
경작지는 거의 양반의 소유가 되므로
일반 백성은 小作農으로 전락했다.
양반계급은 稅金도 없고 軍役도 없었다.
그 부담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못이었다.
그 당시 소출량의 6할은 地主인 양반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에서 국가에 세금을 내고
지난 해 빌려 먹은 곡식에
高率의 이자까지 보태서 갚고 나면
실제로 농민한테 돌아오는 양은
전부의 1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것을 長利쌀이나 환곡(還穀)으로 부는데
그 이자가 무려 5,
많게는 곱배기까지 盛行했다고 한다.
이것은 백성이 죽으라고 있는 나라다.
조선시대 백성은 지금의 북한주민을 생각하면 된다.
 
조선말의 왕들은 國土를 버렸다.
治山治水를 포기했고 국토건설은 할 念頭도 못냈다.
당시의 도로라는 것은 넓어야 牛馬車가 다닐 정도였고
일반도로는 지금의 登山路를 생각하면 된다.
국토는 헐벗었고 거리는 人糞냄새로 코를 찔렀다.
서양인들이 쓴 글에는 예외 없이 이것을 지적(指摘)한다.
아니, 그때를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우리 어릴 때도 그랬다.
인분냄새는 都農을 가릴 것 없어서 만성(慢性)이 되었고
하루를 살면서 몇 차례 인분을 밟는 것은 例事였다.
"똥 밟은 기분"은 그래서 그때 생긴 말이다.
굶기를 밥 먹듯 했고
애들이 뛰면 배 꺼진다고 어른들이 말렸다.
그때 시달린 것이 또 있다.
뱃속에는 각종 기생충을 넣고 살았고
밖에는 파리 모기 빈대 이(), 쥐 등과
자연스럽게 삶을 함께 했다.
月南 이상재 선생이 외교관으로 미국에 갔을 때
대화 상대역인 미국인이 會談에 집중을 못하고
탁자에 기어다니는 이를 잡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는 월남으로부터 이를 옮아
한동안 고생을 했다고 한다.
民生은 이랬는데 나라는 어떠했을까?
 
지금은 明成皇后로 격상된 閔妃 이야기이다.
풍양 씨와 안동 씨의 勢道에 나라를 뺏긴 조선은
이하응 大院君이 집권하면서
그것을 만회(挽回)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며느리를 평범한 身分에서 골랐다.
그는 이름도 별로인 여흥 씨댁 규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여우굴을 피해가다가 호랑이를 만난 것이 되었다.
다시 씨 세력의 세도가 살아난 것이다.
당시의 국가재정은 세도가들의 所有가 되었고
왕실 재정은 賣官賣職으로 충당했다.
그 설명은 이것으로 하나로도 충분하다.
2漢城判尹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이다.
그의 임기는 평균 보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 년에 서울시장이 24번이 바뀌는 것이다.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봉록(俸祿)13달 밀렸다.
그나마 그 중 한 달치인 쌀 6말을 지급하는데
물에 불린 쌀에 모래를 섞었다고 한다.
이때 主務관청은 이름도 그럴싸한 선혜청(善惠廳)이고
그 우두머리는 당상관 겸호였다.
분노가 치솟은 군인들은 선혜청을 공격하고
민씨 세도에 밀려 은거(隱居)하고 있던
대원군을 영입(迎入)했다.
이것이 18822월에 일어난 壬午軍亂이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민비는
경기도 장호원 어느 民家로 피신을 해 잠적했다.
이때 민비를 등에 없고
피신을 도와준 이가 이용익(李容翊)이란 인물이다.
그는 몰락한 먼 씨 왕족출신이지만
구척 長身에 빠른 걸음으로 유명하다.
그의 빠른 걸음을 알려고
高宗은 그를 全州부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그의 署名이 쓰인 부채를 받아오라는 것이다.
이용익은 아침에 서울을 출발하여
그 날 저녁에 전주부사의 부채를 받아 돌아 왔다고 한다.
그는 민영익의 추천으로 官職에 들어선다.
민비를 도운 공로로 그는 빠른 성장을 계속하여
정승반열인 탁지부(度支部) 大臣에 이른다.
그는 抗日운동을 했고 育英사업에도 큰 공로가 있다.
高麗대학교의 前身普成전문학교를 그가 창립했다.
延世대는 선교사 작품이지만
高麗대는 土種 인재양성 교육기관인 것이다.
 
민비가 장호원 어느 民家에 숨어 있을 때
그 동네의 어떤 나이 든 아낙네가
민비를 몰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새댁도 못된 중전(中殿)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구려!"
나중에 이 마을은 민비의 에 의하여
초토(焦土)화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민비의 참 모습이다.
그때 어느 무당이 민비에게
환궁(還宮)하는 날자를 일렀는데
그것이 귀신 하게 맞았다고 한다.
에 그 무당은 궁궐에 불려와
'진령군'이라는 관직을 받고 富貴榮華를 누렸다고 한다.
민비는 궁궐을 온통 무당과 점쟁이 세상으로 만들었다.
2백 여명의 점술인들이 나라를 위한다고 굿판을 벌였고
건물 기둥 밑에다는 寶物을 묻었다.
世子를 위하여 금강산 일만 이천봉에
쌀 한 섬, 베 한 필, 돈 천냥을 올리고 굿을 했다.
매관매직으로 걷은 백성의 세금을 이렇게 탕진했다.
이것은 호시탐탐 노리는 外勢에 먹이감을 제공한 것이다.
 
대원군은 외세와 협력을 거부하고 쇄국(鎖國)으로 맞섰다.
국제정세를 전혀 모르는 所致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빗장을 풀고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데 말이다.
경제를 전혀 모르는 그는
국가재정이 어렵자 화폐를 크게 올린다.
그러니까 名目가치를 올려 재정확대를 꾀했다.
當百錢이란 화폐를 만들어 通用시켰다.
이것은 기존 화폐가치를 백 배 올린 名目상의 화폐이다.
實物경제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경제혼란이다.
이것의 통용으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
민생은 거의 파탄지경(破綻之境)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경우를 몇 년 전에 보았다.
북한의 화폐개혁이다.
이것은 망하는 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민생은 없고 權力만 난무(亂舞)하는 나라.
국토는 헐벗고 백성은 찌들어 쪼그라드는 나라.
自主力量이 없어 외세에 의존하다가 먹히는 나라.
백성은 섬김이 아니라 오직 착취(搾取)의 대상인 나라.
그런 나라를 우리는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지만
북한은 그것을 극복하기는커녕
助長하여 계승한 나라가 되었다.
바로 씨만 바꿔 "金氏朝鮮"이 된 것이다.
 
朝鮮은 안타까운 나라였지만
그렇다고 祖上의 나라를 버릴 수는 없다.
"나는 어머니가 비록 레프라(문둥이)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는다."
 
작가 金素雲 선생이 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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