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3일 토요일

최룡해, 김영철, 황병서, 김중린, 현영철, 조연준, 북괴특수군

23광수 황병서 14광수 김영철

"현영철 '지금이 이조시대냐' 불만…AK소총 90발 처형"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48&aid=0000122601



전남경찰관으로 위장한 광수 포착(159.160.161광수)!
 
어깨의 견장에 전남경찰마크가 새겨진 경찰관 제복을 입고있는 광주의 얼굴과 평양의 얼굴을
비교하여 대조한 결과, 7군데 이상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평양의 김중협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점을 양 얼굴에서 교차확인하고 동일인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두건을 쓴 자가 나오는 시기는 광수들이 도청을 장악하고 시신이 든 관들을 도열해놓고
선동하던 때입니다. 이 때는 경찰관들과 공무원들이 모두 관청을 비우고 잠적을 하였을
때인데 경찰관복을 당당히 입고 군중을 통제하고 있는 시늉을 하는 자, 김중협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남녀노소공작요원배치, 공무원명패, 경찰관 제복 등등 북한정권의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준비로 계획한 공작과 작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에 진짜 경찰관이었다면 사진에서 군중 속에 숨어 반탐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황장엽의 M16에 납치 살해되었을 것입니다. 경찰관 제복이 아니라 정보요원으로 보이는
자들도 납치하여 살해하는 마당에 경찰관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을 것이고
공작을 위한 치밀한 작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진의 얼굴이 비교적 크게 나왔으므로
경찰청에서는 19805월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에 이자의 신원과 얼굴이 존재하는지
확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헌츠페터 동영상에 나오는 카메라와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애써 피하며 우는 소리내지않고
수건으로 눈물만 훔치는 동작을 하고 있는 노파는 리을설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옆에서
통곡하고있는 여인은 광수인지 아닌지 추적중입니다.
, 시신이 든 관을 도열해놓고 선동하는 군중가운데에서도 리을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리을설이 포착되는 사진들만 따로 구성해서 작업이 완성되는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류호 (159광수)
궁석웅 (160광수)
김중협 (161광수)로 명명합니다
 
------------------------------
김류호
생년월일 : 19401201
소속/직책 :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학력사항]
연도미상 함흥화학공업대학
 
[경력사항]
2010.11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의장(해임)*후임 : 강지영
2009.09 해외동포사업국 국장(해임) *후임 : 강지영
2009.04 최고인민회의 제 12기 대의원
2007.01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의장
2006.06 조선소프트볼협회 회장
2006.03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부위원장
2003.09 최고인민회의 제 11기 대의원
2001.08 조선탁구협회 위원장
2000 해외동포영접국 국장
 
------------------------------------
궁석웅
생년월일 : 19440822
소속/직책 : 외무성 부상
출생지 : 평안남도
 
[학력사항]
연도미상 평양외국어대학
연도미상 국제관계대학
 
[경력사항]
1998.08 외무성 부상
1996.03 외교부 10국 국장
1991.03 주 요르단 대사관 대사
1990.02 외교부 부국장
1978.02 주 싱가포르 대사관 2등서기관
 
---------------------------------------
김중협
생년월일 : 연도미상
소속/직책 :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경력사항]
2010.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해임)
2010.01 노동신문 책임주필(해임) *후임 : 김기룡
2009.04 최고인민회의 제 12기 대의원
2007.02 노동신문 책임주필 *전임 : 최칠남
2003 과학백과사전 출판사 사장, 책임주필
1995.02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4.07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2.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베이징에서 제36광수와 만날 경우 기록해둘 것!


왼쪽에서 첫번째가 김일성, 왼족에서 세번째가 최현(최룡해의 부친)이다. 이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최현은 당시 김일성보다 더 높은 형태의 평가를 받고 있던 핵심 인물이었다.



 홍콩 <대공보(大公報)>의 소식에 따르면 제36광수 최룡해가 베이징에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의 항일 전승절 참석을 위해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가 있다. 작년 10월에 최룡해는
황병서, 김양건과 함께 인천을 방문했다.

그리고 최근 지뢰 사건으로 황병서와 김양건이 얼굴을 드러냈고, 
역순으로 최룡해가 베이징에서 박근혜의 수행원들 중에서 정부 관계자와 

만나거나 교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져, 사실상 작년 10월 이후에 
대략 10개월 만에 황병서, 김양건, 그리고 최룡해가 다시 만나게 되는 모양새이다. 

여러 가지 상황 정보와 분석에 기초하면, 현재 "평양 5,18광수 정권"은 사실상 
최룡해(제36광수) 세상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는 김경옥이 제거된 것으로 알려진

작년 10월에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나중에 분석글을 올리겠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최룡해는 "김정은 불참"을 이유로 이미 시진핑과 푸틴을 만났고 

과거 체육위원회 수장으로서 일본 쪽 자금줄도 확보하였을 것이며, 사실상의 백두산
혈통인 빨치산 최현의 아들로서 최현의 활동 당시에는 김일성보다 더 많은 지지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는 현재에도 빨치산 원로세력들에 있어서 지지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로청 출신으로 청장년 파벌의 지지 세력을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으며 

장성택의 수하 중의 한 명으로서 당 행정부장이었던 장성택의 당 내부의 인맥을 공유하거나 
적대시하지 않으면서 장성택의 반대세력과도 연결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5.18 광주대학살에 참여했던 제36광수라는 사실이다. 
지뢰 사건으로 황병서와 김양건이 얼굴을 드러냈을 때, 나는 결국 최고 일인자는 최룡해가 

되었다는 사실을 또 다른 형태로 알려주는 시그널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김양건은 정치국원으로 
승진되어 나타났다. 그렇다면 최룡해는 어떠한 자리를 현재 차지하고 있겠는가?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제36광수 최룡해가 정권 실세 혹은 사실상의 최고지도자로 
부각됨에 따라 광수들 내부에서 커다란 분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최룡해의 부친 최현은 과거 중국의 동북지방(즉 현재의 중국 선양군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고, 최룡해는 시진핑을 만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확인된 사실에 의하면 과거 시진핑을 최룡해가 만났을 때에 최룡해가 군복을 입은 채로 만나려고 
하자 시진핑이 "군복을 벗고 들어오라"고 특별히 명령했던 바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시진핑은 김정은 체제 하에서 최룡해를 군사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임과 동시에, 조금 더 해석하자면 최룡해가 부친 최현을 통해서 중국 동북지역의 

선양군구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이에 대한 경계를 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김정은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홀로 딴청 피우며 응시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누구인가? 바로 제36광수 최룡해이다.  

제36광수 최룡해가 사실상의 "평양 5.18광수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드러난 상황에서 
이제 곧 북중 관계의 행방은 정치 투쟁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이에 대해 반발하는 북한 내부의 광수집단들과, 비(非)광수집단들이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바로 제37광수 박승원 상장이 남쪽으로 넘어온 배경이기도 하다.

 











5.18시민군(북한특수군)지휘부 총책 김중린(제134광수)


광주는 알고 있었다. 전남도청 북괴군 점령 사실을!     -특히 아래 사진들은 5.18족들의 거짓말들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매우 귀한 사진들이다-
아래 노숙자님이 제공한 사진들은 전남도청의 주인은 북한사람들이고, 광주사람들은 완전한 피지배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당시의 광주는 광주인들이 빼앗아 만든 해방구가 아니라 북한군이 점령한 북한 땅이었으며 광주인들은 북한주민들처럼 천대받는 인민이었다.  
아래 사진들은 5월 22일과 23일 양일 사이에 찍힌 사진들이다. 북한특수군은 5월 24일 도청을 떠났다. 5월 21일 오후 5시 계엄군은 북한특수군의 사격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시외곽으로 달아났고, 그로부터 북한군 전투요원들은 광주교도소 수용자들을 해방시키라는 북의 지령을 무리하게 수행하다가 미리부터 참호를 파고 대기했던 공수부대(3공수, 11공수)의 방어에 의해 22일 새벽까지 대부분의 전투력을 잃었다.  
광주작전 총 사령관 리을설(62광수)은 400여명의 북한군 시체와 160여명 정도의 광주인 시체를 분류해야만 했다. 북한군 시체에 최우선을 두어야 했기에 광주인들의 시체는 찬밥이었을 것이다. 북한군 시체를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 리을설은 일단 모든 시체를 전남도청 안으로 운반케 했고, 여기에서 가장 먼저 북한군 시체부터 따로 분류해 보관했을 것이다. 이 숫자는 600명 중 400여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더운 날씨라 시체는 금방 부패하고 썩은 물이 흘러내려 긴급성 포장방법이 등장돼야만 했다. 이렇게 고안된 것이 칠성판(두꺼운 나무 판)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이를 두꺼운 비닐로 둘둘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포장방법은 도청에 있는 광주시민들의 시체에도 적용됐다. 리을설은 북한 시체의 포장 위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그 일련번호가 각각 누구를 의미하는지 기록을 해 갔을 것이다. 이 세상에 시체 포장 430개에 일련번호를 부여한 시체는 여기 말고 없을 것이다. 리을설은 북한군 시체 430구를 분리해 멀리 청주의 산으로 뽑아내 잘 보존하였다.  
광주에는 1980년 당시의 현직 대남사업부 총책인 김중린까지 넘어왔다. 제134광수다. 당시의 김중린이라면 3성장군인 리을설보다 더 상위직책이었다. 그 유명했던 김중린이 광주에 왔다면 대한민국에 기 침투해 있던 똘똘한 고정간첩들이 다 광주로 동원됐을 것이다. 이들의 능력으로는 이 세상에 못할 게 없다. 2014년 5월 13일 청주에서 발견된 430구의 시체 유골은 누가 무슨 내용으로 변명을 해도 100% 북한특수군의 시체다.  
도청 안에는 리을설이 지휘하는 모습이 들어 있고, 리을설과 제68여광수 황순희가 대화를 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광주시민으로 자기 식구가 죽었는지 알고 싶어 도청을 찾아 온 사람들이 북한군 특히 제14광수인 김영철과 우의를 입고 총을 거꾸로 멘 북한군에 의해 통제받으면서 초조하게 줄을 서 있다. 도청 밖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를 보면 감히 도청 앞까지 오지 못하고 도청에서 떨어진 거리에서부터 콩나물처럼 운집해 고개들을 내밀고 있다.  
전남도청을 5.18유공자들이 점령했다는 그간의 선전내용은 모두 아래 사진들로 인해 거짓말이었음이 백일하에 탄로 났다. 도청의 정문은 광주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도록 살벌하게 통제되고 있었음이 아래 사진들에 잘 나타나 있다.  
5월 22일 이후부터의 북한군은 1) 북한군의 엄청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2) 어떻게 하면 광주의 모든 피해를 공수부대의 소행으로 돌리고, 전라도를 영원히 대한민국과 등지게 만들도록 정치공작을 하느냐, 3) 어떻게 하면 북한군의 정체를 감쪽같이 숨기느냐, 이 세 가지였을 것이다.  
황장엽은 3)항을 수행하기 위해 정탐꾼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을 데려가 사살했고, 김중린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전파하고, 으깨진 얼굴 사진, 임산부 배를 가르는 사진, 여성의 젖가슴을 오리는 사진 등을 만들어 배포케 했고, ‘광주비디오’를 만들어 전 전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몰래몰래 보게 했고, ‘찢어진 깃폭’을 저작하여 그 내용들을 담아 소준섭과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케 하는 등의 정치공작을 했을 것이다.  
경악할 일은 북괴가 도청을 시체 분리장으로 활용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도청 앞에 운집해 있는 인파가 말해주듯 광주사람들 전체가 북한군의 도청 점령 사실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35년 동안 찰떡같은 결속으로 타 지역 국민에게 절대비밀로 보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광주는 아니 전라도는 북한특수군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5.18이전 이미 목포 등 지역 도시 및 광주의 가정집, 민박집, 여관, 호텔은 600명의 북한특수군과 전국에서 몰려든 고정간첩들에 의해 1개월 이상에 걸쳐 점거돼 있었을 것이다. 지형이 낯설고 문화가 낯선 지역에 들어오자마자 게릴라 전쟁과 정치공작을 하는 군대는 이 세상에 없다. 유언비어는 수십일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광주와 전라도는 북한특수군의 존재와 활동 내용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전체 국민을 감쪽같이 속이면서 민주화의 화신으로 행세하며, 국민 세금을 사기 쳐, 억대의 일시금 + 수백만원 대의 연금 + 무경쟁의 취직 및 입학시험, 공짜 잔치로 호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진들을 보고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할 인간은 전 세계에서도 없을 것이다. 전라도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곡학아세의 존재들 말고는!!



광수들의 행진 보강


"현영철 '지금이 이조시대냐' 불만…AK소총 90발 처형"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48&aid=0000122601


장성택 숙청주도막강실세 조연준 포착되었습니다.(공석 제49 광수)
 
5.18 광주 현장에서 선동공작조의 작전임무를 수행한
 
조연준 당 중앙위조직지도부 1부부장, 공석중인 제49광수로 명명합니다.
 
조연준 (49광수)
 
------------------------------------------------------------
 
*참고사항
 
앞서 [광수명() 중간보고 (813일 현재)] 내용에 제49광수 조연준 삽입합니다.
 
공석중인 제49광수에 삽입함으로써 전체 숫자 119명은 현행대로 유지합니다.
 
------------------------------------------------------------
 
아래는 신문기사에 난 조연준에 관한 발췌내용입니다.
 
장성택 숙청 주도 북 인사권 쥔 조연준 알고보니...당 중앙위 지도부 1부부장으로 본부당 책임비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고모부 장성택의 숙청을 주도한 조연준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현재 본부당 책임비서까지 맡고 있는 권력의 핵심인 것으로 알려졌다.
 
11일 북한 내부에 정통한 대북소식통은 조연준이 중앙당 조직지도부 간부1부부장으로서 이번 장성택 숙청을 주도했다조연준은 1부부장 외에도 중앙당을 지휘하는 본부당 책임비서까지 맡아 본부당 책임자로서 권한이 막강하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물론 김정은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지만 조연준의 손끝에서 고위급 간부는 물론 각 도당 책임비서까지도 결정된다면서 김창선 서기실장이 책사 역할을 맡고 있다면, 조연준은 간부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실세라고 설명했다.
 
소식통은 그러면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최룡해에게도 인사권은 없는 만큼 결국 최룡해의 숙청 여부도 조연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로 여전히 북한에서 당의 통제 아래 군부가 있는 점을 강조했다.
 
조연준 간부1부부장은 간부들의 골수까지 신원조회를 해서 공산당원으로서 적합한 인물인지를 분석하는 업무를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새로 발탁할 간부들의 집안 내력은 물론 현직 간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일을 하는 것도 물론이다.
 
소식통은 지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25000여명이 숙청된 심화조 사건 당시 문성술 당 조직지도부 본부당 담당 책임비서가 숙청된 일은 있지만 이후 당 조직지도부 1부장 등이 숙청된 유례가 없을 만큼 당 조직지도부는 권력기반이 탄탄한 자리로 당내 비밀을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부서이다라고 전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인권유린 주도"조연준 등 4명 막강 권력"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현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18일 보도했다.
 
RFA는 한미연합사령부의 국제관계 담당관을 지낸 로버트 콜린스 박사를 인용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외에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이 인권유린 책임자 처벌의 최우선 대상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콜린스 박사는 17일 미국 워싱턴의 한미경제연구소(KEI)가 국제한국학협의회(ICKS), 북한인권위원회(HRNK)와 공동주최한 북한인권 토론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콜린스 박사는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김경옥, 민병철, 황병서 등 제1부부장 네 명이 북한 사회를 운영한다""이들 네 명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북한을 다스리는 법은 김씨 일가의 유일영도체제를 위한 수령신격화 법령인 '유일사상 10대강령'"이라며 "조직지도부가 이 강령의 이행을 주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에서 핵심 간부들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모든 간부와 당원, 주민의 생활을 통제하는 조직지도부는 지난해 12월 장성택 숙청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콜린스 박사는 "김정은이 모든 인권유린의 최종 책임이있다"면서도 "과거 2차대전 종전 후 나치독일의 고위관료와 장성 등이 반인륜적범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됐던 뉘른베르그 재판과 비슷한 일이 생길 경우 약 240여 명의 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들 역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5.18북한특수군 제1.2.3원조광수 평양에서 찾다!

그동안 제1광수가 원조광수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제1광수는 농업상 김창식으로 밝혀졌으며
제3광수가 원조 김광수로 밝혀짐에 따라 최초발견된 제1광수는 최초발견된 광수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원조광수의 자리는 제3광수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1원조광수는 농업상 김창식으로 파악되었으며,
2광수는 노동당 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김성남,
3광수가 바로 김광수로 파악되었습니다.
3광수는 어느회원님이 체격이 좋다고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체육인으로 62kg
레슬링 선수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원조광수로 알려졌던 전투조 지휘군관 기관총 사수 제1원조광수는 김창식
2광수로 차량선탑을 한 자는 김성남
3광수로 알려졌던 자가 바로 김광수로 신원이 특정되어
이미지 그래픽분석작업이 완료되는대로 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료가 올라오면 그 이후에 제1,2,3광수의 신원을 다같이 확인하여보시기 바랍니다.
 
1광수 김창식
소속/직책 :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2011.01 농업성 상(해임)
2009.04 최고인민회의 제 12기 대의원
2009.04 농업성 상(유임)
2009.01 농업성 상(재임)
2007.03 <김일성 훈장> 수훈
2006.10 농업성 부상
2003.07 농업성 상(해임)
2001.02 농업성 상
1998.09 농업성 부상
1998.09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1997.10 농업위원회 제1부위원장
1975.10 농업위원회 간척지 설계사업소 기사장
 
 
2광수 김성남
생년월일 : 1953
소속/직책 : 당 국제부 부부장
2010.01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  
 
 
3광수 김광수 (레슬링선수 및 코치)
 
 




2광수 보충설명입니다.
 
모든 분석은 분석자의 주관적인 분석입니다.
보도나 발표시에 분석표의 취사선택은 각자 고유의 권한입니다.
분석자는 그 어떤 것도 요구할 아무런 권리나 권한이 없습니다.
다만 오류가 발생하였을 시에 수정을 요청할 수는 있습니다.
 
분석자는 분석표 사용자들이 사용 용도에 맞게 항상 가감을 하도록 권장합니다.
광수들을 찾아내어 5.18 대사기극을 밝혀내고 역적 김대중을 처단하기를 바라며,
대한민국에 정의를 바로세우기를 원하며, 북한정권에 추종한 반역자들을 모조리 참수
처형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북한정권의 누구든지, 황병서든지 김양건이든지 최룡해든지 김영철이든지
그 누구든지 500만 야전군을 위해하도록 지시한 배후로 지목되면 중국인 무역상이나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평양으로 접근해 해당자의 집무실과 자택 동선에서
그를 꼭 껴안아 자폭하여 처단할 것입니다.
폭탄은 출입국경에서 엑스레이에 드러나지 않는 강력한 액체폭탄입니다.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처단할 수도 있으나 이 한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폭할 것입니다.
전사는 전장에서 죽는 것이 명예요 영광입니다.
 
 







5.18광주의 급소 복면부대가 곧 북한특수군
 
 
삼베두건 쓴 자, 위장한 북한특수군 제163광수 김영일




 
5.18광주의 급소 복면부대가 북한특수군
 
1980528일자 한국일보는 521일 이른 아침 광주시가지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상당수는 밤 사이 빼앗은 군 지프와 트럭, 고속버스, 시내버스 등 각종 차량을 타고 시가를 질주하며 시위, 차량을 타고 다니는 상당수는 낫, 도끼, 몽둥이, 곡괭이 등으로 무장하고 일부는 M16, 카빈 소총 등을 휴대해 시가엔 공포의 그림자가 휩싸이면서 유혈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21일 고졸 재수생 정상현도 오전 10시경에 벌써 M16 등으로 무장한 복면부대가 출현한 사실을 증언한다:
 
거의 모든 차들이 전남대로 향하여 나아갔는데 10시경 전남대에 이르니 시민들이 벌써 1만 명 가량 모여 있었다. 중략. 시민과 계엄군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는데 계엄군이 정문 수위실 위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두었기에 제거하라고 요청하자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없앴다. 중략. 시민들이 공수부대한테서 빼앗았는지 무기고에서 탈취한 것인 지 수류탄, M16 등 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복면을 한 사람도 있었다.” (정상현, 1988)
 

 
복면부대의 21일 활동은 광주시민이라면 감행할 수도 없는 신출귀몰한 군사작전들을 여기 저기서 각개전투 형식으로 수행한다. 날이 새기 전에 시민군 점령지역에 광주시민 2명을 살해하여 시신을 남겨 놓고 후에 시체장사에 이용하도록 한다, 오전 8시경에는 20사단 지휘부를 습격 지프차들을 탈취하여 복면부대를 태우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직행한다,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수 많은 군용 차량과 트럭 등을 탈취하여 전라도 각지에 산재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한다, 오후 1220분부터는 광주교도소를 무장 습격한다, 광주도청을 오후 5시 반경에 점령한 후 무장 시민군이 통제한다.
 
이후 22일부터 북면부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26일 자정까지 신원미상의 600여 명 시민군은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 시내를 사실상 대한민국 법이 사라진 해방구로 통치한다. 도청을 점령 후 22일부터 나오기 시작한 무기반환을 요구했던 온건파 시민군에 비해 도청사수를 끝까지 주장하며 무장을 주장했던 무장봉기파 시민군 대부분은 복면부대였다고 당시 광주에서 눈으로 직접 보았던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에서 그가 복면부대를 광주시민으로 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순수한 시위대원들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갖는 네 번째 의문이다. 학생 데모대들은 처음부터 떳떳했다.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찍히는 것도, 붙잡혀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4, 15, 16일의 평화적 시위 때는 더더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20일 운전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나왔을 때나 21일 관광호텔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해 협상을 시도할 때도 복면을 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고 학생들이 들어가고 난 후부터 시위대원 중에는 복면을 한 사람이 부쩍 눈에 띄었다. 만약 복면부대가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나중에 검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18일부터 21일까지는 왜 없었을까? 왜 기자의 카메라조차 학생들로부터 의심받아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던 22일 이후에 복면을 한 사람이 많았을까?
 
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한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자는 24일 오후2시쯤 당시 도청2층에 있던 학생수습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종배 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민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을 때 학생 측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 갔다가 위원장 대신 부위원장을 만났던 것.
 
이때 김씨는 우리는 총을 반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군이 들어와 질서를 회복하면 맨손으로 금날로에 나가 다시 민주화를 외치겠습니다며 총을 회수해서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만 해도 김씨는 온건파였다. 이로부터 수 시간 후 그는 조건부 강경파로 선회하게 되지만, 본심은 어떤 조건만 받아 들여지면 총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 층으로 내려가던 김씨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 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가로막는 이들 강경파의 거의 모두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 올 수 밖에 없었다. 복면의 강경파들은 이렇다 할 수습 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조건 반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불순세력이나 배후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김영택, 1987, 155-156)
 

 
527일 새벽의 도청 진압작전은 소준열 장군의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방법을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며, 수습위를 통해 도청 안의 무장 단체가 265시까지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계엄군을 투입하겠다고 몇 번이나 알리며 무기 반납의 기회를 주었다. (월간조선특별취재반, 1985, 463)
 

 
무장 시위대 중에서도 특히 복면부대는 광주5.18단체에게는 가장 곤혹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그들이 북한특수군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검찰의 수사기록, 계엄군과 광주시민들의 증언, 자유북한군인연합 측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의 각종 증언 및 기록, 5.18 당시 광주 증심사에서 활동했던 간첩 손성모의 증언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추정해 왔다가, 20156월부터는 5.18광주에 침투했던 북한특수군들 중 살아서 북한에 돌아간 후 지금 현재 북한에서 핵심당간부 및 군부실세가 되어 있음을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에서 사진으로 입증하게 된다.
 
“5.18광주에 북한군 침투라는 주제는 이제부터 대한민국 역사, 정치, 교육, 국방, 언론, 학계, 사법부 등 실로 전 방위적인 쓰나미가 되어 이 나라를 흔들어 댈 것이고 만일 그 쓰나미에도 불구하고 5.18단체의 왜곡날조의 역사가 살아 남는다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정통성을 상실하고 북한 김일성 악마집단과 한 편이 되어 적화통일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실로 대한민국이 죽느냐 사느냐의 사생결단이라고 하겠다.
 
복면부대를 유령부대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전라도 무기고를 모두 털어 무장하고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간첩과 사상범 270명 등 총 2700명의 죄수들이 수감된 광주교도소를 5차례 습격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으니, 5.18민주화운동은 원천무효가 되는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5.18단체 그들이 믿는 곳은 오직 1997년 대법원 인민재판 결과이지만, 머지않아 복면부대가 곧 북한특수군이라는 사실이 국가기관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 받는 날에는 5.18광주 그곳은 여적죄인들의 심판대로 변하게 될 것이다. 법은 몰랐다는 이유로 면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
 
2015. 8. 12. 만토스.
 
 
 










댓글 없음:

댓글 쓰기